최윤석 시각예술가∙연출가 ****
#물지랖 #찻자리 #다우는익명 #찻잔속으로깊이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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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 차(茶)를 취미로 삼으면서 계절이나 날씨가 바뀔 때 어떤 차가 어울릴지 잠시 생각해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요 며칠은 차라곤 단 한 홉도 마실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록적인 무더위이지만, 이 와중에도 이 열기와 조화로울 맛이 무얼까 궁리해봅니다.
꽤나 차생활을 오래 한 것처럼 들리겠지만, 정작 차를 취미로 두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차에 관해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이 여간 쑥스러운 게 아닌데요. 하지만 제가 독자라면 누군가가 어떤 취미에 빠져드는 순간을 엿보는 일이 꽤 흥미로울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몇 자 적어봅니다.
차에 애정과 호기심을 갖게 된 이유는 저의 ‘물지랖’ 때문일 겁니다. ‘물지랖’이란 ‘물’과 ‘오지랖’을 합성한 말로, 아마도 저만 쓰고 있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요. 식당에 가면 제일 먼저 물컵을 챙기고, 식사 중간에도 동행의 물컵이 비지 않았나 식당을 나설 때까지 살피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습성은 술자리에서도 이어집니다. 다만, 술을 강권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모두의 앞에서 말해야 할 때 쉽게 목이 마르는 편이라 목을 축이기 위해 물을 자주 마시곤 합니다. 비록 커피나 차를 마시면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고, 술을 마시면 금세 취해 고꾸라지고 말지만, 어떠한 수분으로든 성대를 촉촉하게 감싸고 나면 언제까지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차에 취미가 생긴 결정적 계기는 ‘찻자리’입니다. 친구의 초대로 함께 방문했던 첫 차회(茶會)에서 차를 우려내는 각양각색의 아기자기한 기물들, 찻자리 주인이 내어주는 절묘한 맛의 차, 그리고 이 모두를 관장하는 팽주(찻자리의 주인)가 이끄는 분위기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격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으면서 고요한 가운데, 서로 소개를 생략한 채 차를 향한 애정과 호기심으로 은은하게 타오르는 찻자리의 기묘한 열기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 차회를 방문한 날의 일기에는 당시의 격앙된 소회가 다음과 같이 짧게 적혀 있습니다.
‘다우(茶友)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우는 익명이다!’
이처럼 물을, 넓게는 목을 축일 수 있는 거의 모든 물질(국물 포함)을 중요시하는 마음과, 차를 함께 나누어 마시는 '익명의 모임'이라는 특수한 추억을 통해 저에게 차는 점차 미지의 영역이자 호기심의 보고가 되어갔습니다.
이러한 취미가 무르익는 데에는 차를 단지 마시는 일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팽주가 되어 손님들을 대접하는 일 또한 한몫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험자로서 차에 대한 깊은 지식을 전하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나누는 데 그치는 자리입니다만, 차를 향한 호기심과 애정이 가장 클 때(다른 말로 뭣 모를 때)에만 가능한 일이겠지요. 올해에는 눈여겨보고 있던 차 관련 책을 한 권 구입해서 틈나는 대로 읽어볼 요량입니다. 이렇게 얕은 찻잔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차를 향한 탐구는 올해도 이어져, 여유가 되는 대로 맛보지 못했던 차를 구입하거나 신중하게 다기를 고르고, 흥미로워 보이는 차실을 찾아 친구들과 방문하곤 합니다. 매년 열리는 각종 차 박람회도 빠짐없이 찾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올해에는 친구들과 하동으로 직접 차를 만들러 가는 기념비적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직접 만든 차는 각자 알아서 마시기로 했습니다!)
조금 더 돌이켜보니 지난해 9월에는 <팽취끽>이라는 차회 형식의 퍼포먼스를 선보였었네요. ‘태어나기 전날의 풍경을 찾아 떠나는 정신적 시간여행’을 표방하며, 제가 태어난 해인 1981년과 ‘탄생’을 주제로 네 가지 차를 준비해 관객에게 대접하는 자리였습니다. 준비된 이야기를 다식 삼아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저는 함께한 관객들에게 물에 관해 생각해 보기를 제안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물을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지’를 물으며 지구상에서 쉼 없이 일어나는 물의 순환을 상상하는 가운데, 이미 우리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요. 이러한 지구과학적 공상 속에서 관객에게 대접했던 대만 진미다원의 1981년 우롱 노차와 바람떡이 가을의 조짐이 보이던 당시의 계절과 근사하게 어우러졌던 그 기억이, 9월이 다가오니 불현듯 입안에서 되살아나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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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하는 차와 다과 페어링
대만 진미다원의 1981년 우롱 노차와 바람떡. 초가을과 어울리는 조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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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칠분차 삼분정(七分茶 三分情)은 찻잔에 차를 따를 때 잔의 70%만 채우고 나머지 30%는 따뜻한 정과 배려로 채운다는 중국의 다도 예절이자 격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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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석 (시각예술가 ∙ 연출가)
자전적 에피소드를 영상과 퍼포먼스로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시각예술가이자 기획·연출가. 차회(茶會)의 형식을 빌려 자신이 태어나기 전날의 풍경으로 떠나는 정신적 시간 여행 <팽취끽>(LDK, 2025)을 비롯하여, 작품으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시도한 <얼굴을 기다리며> (아웃사이트, 2020) 등 개인전 다수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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