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잃어버렸으나 슬프지 않(게 될 수 있)는 것들

한정현 소설가


#언어의경계 #음악과언어 #무화되는 #음악으로대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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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는 항상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무언가를 구분하는 순간, 배제와 선택이 발생하니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경계가 분명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언가를 생각해 볼 때 가장 쉬운 방법은 그 반대편을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경계가 모호한 것. 사실 그런 것은 많아요. 소리, 음악, 향기, 전파... 이런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죠. 가령 누군가 마음을 먹고 소리를 낸다면, 그건 물리적인 것으로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낭만적인 이야기만은 아니에요. 아주 현실적으로 들여다봐도 그렇죠. 대남방송이라든가 북한 심리전 같은 것들이 소리로 이뤄지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기엔 경계가 없어요.

제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건 소리를 경유해서 만든 음악, 노래에 담긴 언어의 경계성입니다. 노래라는 것은 항상 ‘언어’를 내포하고 있어요. 저는 언어만큼 정체성이 뚜렷하고, 타자에 대한 배척도가 높은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특정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 어떤 집단 안에 쉽게 귀속되고, 반대로 특정 언어를 하지 못하는 순간 어느 집단에서든 쉽게 배척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모국어’라는 말은 때때로 폭력적으로 들리기도 해요. 일본이 오키나와에서 학살을 감행했을 때도 언어는 아주 유용한 무기로 쓰였습니다. 그들은 오키나와인을 구분하는 방법으로 언어를 사용했어요. 물론 일본 제국의 이 방식은 조선어 말살 정책에서도 드러나듯, 언제나 유효했습니다. 역사를 뒤집어보지 않더라도, 국내 여행만 가도 금세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마주할 수 있어요. 지역이 달라지면서 달라지는 언어들, 이것을 통해 내부인과 외부인이 구분되는 경험은 아마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노래 안에서는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야 맙니다. 어린 시절, 영어를 몰랐음에도 저와 제 친구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춤을 따라 추었죠. 일본 대중문화 금지라는 법적인 명령까지 피해 가면서 쟈니스와 엑스재팬 같은 일본 음악을 들었고요. 그들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 순간만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던 거예요. 사실 금지라는 것도 몰랐죠. 왜냐면 일본 음악을 들음으로써 이미 그 경계를 넘어버렸으니까요.

에둘러 말했지만, 우리의 세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언어처럼 절대 없어지지 않는 경계를 가진 것들이 있어요. 이 경계는 정말 곳곳에 있습니다.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주권을 취득해도 국적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 또한 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쉽게 사라지는 경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상,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도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아요.

그런데 이 경계는 결국 사람들 내면의 경계 없음 안에서만 무화돼요. 음악 안에서의 언어가 우리를 굉장히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을 때, 그것에서 우리는 슬픔이 아닌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그것이 경계인지도 모르게 되는 그런 것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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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 (소설가)

201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중편소설 『마고』, 단편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쿄코와 쿄지』, 에세이집 『환승 인간』 등을 집필했다. 2019년 오늘의 작가상, 2020년 젊은작가상, 퀴어문학상, 김유정문학상, 2021년 부마항쟁문학상, 2025년 5.18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일본과 미국, 한국의 역사적 연관성 안에서 주로 여성과 퀴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삶을 그리는데 천착하고 있으며 일본과 한국의 문화사를 바탕으로 한 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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