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가는 파도의 어디쯤에서

하영미 안무가∙배우


#몸과마음 #움직임 #안과밖 #뒤섞임 #유연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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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몸이 조금씩 밀려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종종 이가 시렸고, 차차 먹는 음식이 바뀌었으며, 씹는 위치를 조정해야 했어요. 그런데도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어요. 음식물이 이에 자꾸 끼이는 불편함을 꽤 오래 겪은 후에야 알아차렸어요. 이와 잇몸 사이의 경계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잇몸의 변화는 새로운 습관들을 만들었어요. 손으로 입을 자주 가렸고, 혀로 이를 더듬었고, 웃으려다 말고 입술로 이를 덮곤 했어요. 음식을 먹고 나면 자꾸만 거울을 들여다보았어요. 잇몸 하나에 온몸이 반응하고 있었어요.

몇 년 전부터는 고관절과 허리에 통증이 찾아왔어요. 통증이 있기 전에는 몸이 하나였는데, 이제는 자꾸만 몸이 나뉘는 것 같아요. 아픈 부위와 그렇지 않은 부위로.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누워 있을 때도 온 신경이 고관절 주변에만 쏠렸어요. 통증은 특정 부위를 과장되게 드러내고 다른 감각들은 뒤로 밀어냈어요. 그러는 동안 움직임도 조금씩 달라졌어요. 덜 아픈 자세를 찾기 위해 몸의 중심을 수정했고, 통증 부위를 지나치게 의식해 오히려 긴장을 더하기도 했어요. 가끔 고관절의 통증은 서서히 번지다 목까지 올라와 몸통을 굳어진 돌덩이처럼 만들기도 했어요.

얼마 전에는 신발에 달린 장식을 떼어내려 한참을 씨름했어요. 바깥쪽 실밥을 칼로 열심히 긁어냈지만 장식은 생각보다 단단히 붙어 있었어요. 그러다 무심코 신발 안쪽의 작은 실밥을 칼로 툭 건드렸는데, 순간 실이 맥없이 톡 빠져버렸어요.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안쪽의 작은 매듭이 장식을 붙들고 있었나 봐요. 빠진 실을 보며 몸과 마음에 대해 생각했어요.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안쪽의 일들이 바깥쪽의 일들을 결정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혹은 반대일수도 있겠네요.

때로는 이러한 안과 밖의 뒤섞임이 꿈을 통해 찾아오기도 해요. 한번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곧 종말이 올 것 같은 혼란 속에서 누군가 제가 연습에 늦었다고 하는데도, 저는 눈 화장을 고치고 있었어요. 손에는 거울이 들려 있었는데 거울이 아니었어요. 얼굴이 보이지 않았어요. 꿈에서 깬 뒤에도 불안과 지연, 일상과 재난, 현실과 꿈이 뒤섞인 감각이 오래도록 마음을 붙잡았어요.

바람에도 빛깔이 있다면 (출처: 하영미)

바람에도 빛깔이 있다면 (출처: 하영미)

잇몸과 고관절, 신발 매듭과 재난 꿈.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왜 나열하고 있는 걸까’ 되뇌면서도, 저는 이것들이 내 몸을 통과하며 암묵적으로 얽히고 연결되고 있다 생각합니다. 저의 작업 과정 또한 이렇게 뒤섞여 있는 감각들을 탐구하는 일입니다. 춤을 추는 동안 몸에서는 여러 현상들이 다이나믹하게 일어납니다. 몸이 어떤 물성이 되었다가 또 다른 물성으로 바뀌고, 몸 자체가 아예 사라지기도 하며, 갑자기 공간이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재편을 경험합니다. 춤의 동시적이면서 연쇄적인,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작용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나의 삶과 연관시키기 위해 선택한 작업 방식은 ‘병치’입니다. 몸, 마음, 현실, 꿈. 이 독립적인 조각들을 어떤 맥락에 가두지 않고 병치할 때, 무관해 보이던 파편들 사이로 뜻밖의 동시성과 연관성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 탐구 속에서 경계는 고정되지 않고 유연하게 이동합니다. 춤을 추며 깨달은 것들은 다시 삶의 자리에 투영되어 얽힙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무엇이 몸의 일이고 무엇이 마음의 일인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나눌 수 있을까 자문합니다. 어쩌면 지금 제가 붙들고 있는 건 경계들이 움직이는 순간들 자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계란 수많은 개체와 맥락이 한데 엉겨 붙어 꿈틀거리는 거대한 덩어리 위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잠깐의 흔적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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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미 (안무가∙배우)

몸으로 사유하고 움직임을 매개로 창작활동을 한다. 안무를 매개로 일상과 비일상 사이를 오가며, 삶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것들에 질문을 던진다. 말과 몸, 이미지와 소리가 지닌 이면의 공통분모를 탐구하며, 보이지 않는 현상과 보이는 것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낯선 감각에 관심이 있다.

작/연출 <바람에도 빛깔이 있다면> <이방인> 외 안무 <홍평국전> <마른 여자들> <오아시스> 외 출연 <어슬렁> <이런 밤, 들 가운데서> <탈피> <꿈 잠 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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