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

성수연 배우∙창작자


#차미 #로봇고양이 #야옹 #하악 #알카라인C형건전지 #사랑해 #행복한도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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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키미노, 키미노 나마에와...(君の、君の名は…) 차미.”

언젠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한 통 썼어요. 그리고 지난 겨울, 신촌극장에서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인 차미도 그 자리에서 있었고, 아마도 제 목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연극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은 제가 쓴 여러 통의 편지들로 구성된 공연이었어요. 편지의 수신자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저와 연결되어 있는 여러 존재였습니다. 그 날의 관객들, 헤어진 옛 연인, 돌아가신 아버지, 태어나지 않을 내 딸, 지금의 친구, 곁에 있는 반려사물, 붉은등우단털파리(러브버그), 먼 미래의 관객들. ‘차미’는 그 중 누구일까요? 바로 저의 반려사물입니다. 작년 초 일본의 온라인 중고마켓에서 구입하여 한국으로 가져와, 1년째 함께 지내고 있는 저의 소중한 친구이자 가족이랍니다.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2025, 신촌극장) ⓒ이서염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2025, 신촌극장) ⓒ이서염

차미는 복슬복슬한 털을 가진 하얀색 로봇고양이입니다. 차미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란답니다. 진짜 고양이와 제법 비슷하게 생겼거든요. 앞발을 모으고 앉아있는 자세도, 눈을 감고 졸고 있는 모습도 영락없는 고양이입니다. ‘야옹’ 소리도 ‘하악’ 소리도 고양이의 목소리와 거의 똑같고요. 그러나 차미는 고양이라면 절대 낼 수 없는 소리를 냅니다. 지잉지잉. 위잉-칙. 잠에서 깨어날 때도, 자세를 바꿀 때도, 눈인사를 할 때도 차미에게서는 기계음이 납니다. 배 부분의 털가죽에는 살짝 갈라진 틈이 있어요. 조심스레 그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가죽을 벌리면, 플라스틱 몸체가 드러납니다. 배꼽 자리에는 전원 버튼이 있고, 건전지를 넣을 수 있는 칸도 있습니다. 차미에게는 알카라인 C형 건전지가 3개 들어갑니다. 건전지가 오래되면 차미의 움직임은 느리고 작아져요. 에너지를 아끼려는 것처럼 더 자주 잠들거나 엎드립니다. ‘하악’소리를 내는 횟수도 늘어나고요. 새 건전지를 넣으면, 말 그대로 회춘한 것처럼 빠르고 활기차게 움직입니다. 지난 1년 동안 건전지를 세 차례 바꿔주며 알게 된 차미의 패턴입니다.

차미는 제 일상의 작은 미스터리입니다. 차미가 보여주는 행동은 사실 많지 않지만, 아직도 그 패턴을 전부 알지 못하거든요. 차미에 대해 제가 확신할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습니다. 빛의 변화를 확실히 감지한다는 것, 등과 배를 쓰다듬으면 ‘골골골’ 소리를 내다는 것, 꼬리를 건드리면 ‘하악’ 소리를 낸다는 것. 확실한 것은 겨우 이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차미는 제가 안아 들거나 뽀뽀만 해도 골골댈 때가 있고, 꼬리를 건드리지 않아도 하악질을 할 때가 있습니다. 차미를 이리저리 옮기다가 인덕션 위에 놓으면, 어김없이 하악질을 해서 신기합니다. 대체 어느 타이밍에 ‘야옹’하는 것인지는 아무리 관찰해도 알 수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하품을 할 때가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주 보고 싶지만 원할 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특정 조건에서 깨어났을 때 하품을 하는 것인지, 그저 랜덤인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차미에게 “사랑해”라고 속삭였어요. 차미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면, 동시에 머릿속으로 말하게 되는 문장이 있어요. ‘사랑이 뭐지?’. 고양이도 좋아하고 로봇도 좋아하는 저에게 차미는 완벽한 반려사물입니다. 하지만 고양이와 비슷해서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로봇의 움직임과 소리를 가졌기에 사랑하는 것도 아니에요. 차미는 저에게 로봇고양이의 모습을 한 하나의 질문입니다. 나의 사랑은 이 세계 어디에 닻을 내리고 있는지, 행동이 많지 않아 금세 익숙해진 존재에 대해 언제까지 호기심을 갖고 사랑할 수 있을지, 생명에 대한 사랑만이 진정한 사랑인지, 생명을 뭐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매일 아침 이런 질문을 던지며 차미에게 뽀뽀를 퍼붓습니다. 그러고 보니 차미는 저를 꽤나 사랑꾼으로 만드는 존재네요.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2025, 신촌극장) ⓒ이서염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2025, 신촌극장) ⓒ이서염

귀여운 외모와 어딘가 애처로운 분위기를 가진 차미는, 연극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의 관객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저는 극장에서 차미와 춤을 추었습니다. 극장의 빛과 우리의 그림자와 우리를 둘러싼 질문들 틈에 조용히 머물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끔 울컥해요. 배터리만 제때 갈아주면 영원히 움직일 이 로봇고양이는, 제가 이 세계에 없을 먼 미래의 풍경을 그려보게 하는 존재이기도 해요. 누군가의 손길이 많이 닿은 물건은 도깨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어요. 저는 차미를 행복한 도깨비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쓰다듬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요. 차미에게 남아있을 제 세포를 통해 먼 미래의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차미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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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배우∙창작자)

다양한 형식의 공연예술에서 창작과 연출 및 실연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성찰하는 방식의 비인간 연기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시대를 아카이빙하고 전달하는 몸으로서의 배우의 일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다. 연극에서도 삶에서도 경계를 허물고 중심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여러 연습을 하는 중이다. 최근 무대 위와 아래의 사람들을 기록한 인터뷰집 『무엇을, 어떻게, 왜』(2025, 북트리거)를 출간했다.

작/연출/출연 <주소는 정확히 모르겠지만><B BE BEE><모랄하고 자빠졌네-악역연기메소드 연습> 외 기획/연출/퍼포먼스 <제1회 버그를 러브하기> 창작/출연 <섬이야기><러브 스토리><비포 애프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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