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링은 나의 동반자

구달 에세이 작가


#키링덕후 #키링달고다니는이유 #작고가볍지만묵직한 #키링과인간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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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회색 후디를 한 벌 주문했습니다. 올해 11살이 된 반려견 빌보의 어릴 적 사진을 넣어 제작한 의류였어요. 며칠 뒤 배송된 박스에는 후디와 함께 깜짝 사은품이 들어 있었습니다. 빌보 사진에서 얼굴만 확대해 값싼 정사각형 아크릴 홀더에 끼워 만든 키링. 화질이 깨져 한층 댕청해 보이는 빌보 표정 덕에 비급 감성을 물씬 풍기는 그 조잡한 물건을 손에 쥐고 꺅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키링 덕후거든요. 양말을 좋아해서 양말로 책 한 권을 썼지만(《아무튼, 양말》이라는 에세이입니다), 사실 키링으로도 책 한 권을 뚝딱 써낼 수 있을 만큼의 덕력을 갖추었답니다. 후디 제작에 영혼을 갈아 넣었을 디자이너 선생님에게 송구할 정도로 키링에 마음을 빼앗겼지요. 옷은 매일 입을 수 없지만 키링은 매일 달고 다닐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문제는 고리 품귀 사태였습니다. 제가 소유한 모든 가방의 모든 고리마다 키링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새 키링을 어찌 걸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키링 풀소유의 위기 봉착. 고심 끝에 가장 자주 메는 백팩에 달아 놓은 키링 여섯 개를 전부 빼고 빌보 키링을 중심으로 새판을 짜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키링이 여섯 개나 일곱 개나 그게 그건데 그냥 하나를 추가하면 안 되느냐고요? 불가능합니다. 저에게 있어 키링은 자기표현 수단이고, 에세이스트로서 지금 제가 한글 자모를 조합해 다른 문장이 아닌 바로 이 문장을 만들어냈듯이 키링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제 정체성 혹은 개성이 달리 표현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하는 키링이 나란 사람을 표상한다는 생각으로 신중히 접근해야 하지요.

한 시간 남짓 키링을 뗐다 붙였다 난리를 피운 끝에 결과물을 완성했습니다. 우선 앞주머니 지퍼 고리에 빌보 키링과 작은 손뜨개 양말을 조합해 달았고요. 본체 지퍼 고리에는 은색 뼈다귀 모양 참이 달린 우븐 키링, ‘Writer’라고 적힌 아크릴 키링, 10.29 이태원 참사 추모 리본을 달았습니다. 손뜨개 양말은 지인의 어머니로부터, 우븐 키링은 자투리 실로 예술을 하는 텍스타일 디자이너로부터, Writer 키링은 JTBC 굿즈 숍을 구경하고 온 친구로부터, 보라색 추모 리본은 지난해 겨울 수많은 이들과 함께 응원봉을 흔들었던 광장으로부터 온 물건입니다. 빌보 키링은 10년 전 어느 가을에 네발친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았던 놀이터 풍경으로부터 왔지요. 하나같이 작고 가볍지만 이 물건들 안에는 사람-사람, 사람-동물, 사람-사물이 상호작용한 시간들이 묵직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제공: 구달

사진제공: 구달

저는 키링을 좋아하지만 저에게 허락된 가방 고리 개수 이상으로 키링을 사 모으지는 않습니다. 제 나름의 소비 원칙이 있거든요. 물건을 사는(buy) 데서 기쁨을 찾지 말 것. 물건을 사용하며 기뻐할 것. 키링을 사용한다는 건 키링을 매달고 그 무게를 느끼며 산다(live)는 뜻입니다. 보라색 리본에 담긴 연대의 마음을 기억한다는 의미고, 그 리본이 가방에 달려 있기 때문에 출근길에 마주친 1인 시위자의 피켓에 적힌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섬세하게 실을 꼬아 만든 우븐 키링을 만지작거리면서 이 한 조각의 무용한 아름다움이 삶에 왜 필요한지를 생각해 본다는 의미입니다. 키링은 나를 표상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세계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키링의 가장 큰 매력이지요. 저는 키링과 세계관을 공유하며 살아갑니다. 일종의 동반자 관계라고 할까요**.** 저는 키링을 사용해 정체성을 표현하고, 키링은 저를 사용해 자기 안에 고인 이야기를 바깥으로 흘려보냅니다.

고작 키링에 이토록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역시 제가 못 말리는 덕후이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저 역시 고작 인간일 뿐이니 괜찮습니다. 고작 물건인 키링과 고작 인간인 제가 의기투합하여 크든 작든 어떤 독창성을 조합해 내고 얕든 깊든 세계의 면면을 파악해 나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가방에는 어떤 키링이 달려 있나요?

사진제공: 구달

사진제공: 구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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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달(에세이 작가)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하며 틈틈이 에세이를 썼다. 『아무튼, 양말』을 쓴 계기로 양말 가게에 취직해, 지금은 양말을 팔며 틈틈이 에세이를 쓴다. 소소한 일화에서 사소한 의미를 건져 올리는 작업을 좋아한다.

『읽는 사이』 (공저), 『아무튼, 양말』, 『읽는 개 좋아』, 『일개미 자서전』 등을 썼고 『고독한 외식가』, 『한 달의 길이』 등의 독립출판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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