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완선 SF평론가
#보드게임추천 #준비물한국어실력 #어휘력한계극복 #니맘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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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고의 보드게임은 아크스였다. 캠페인 버전을 플레이했는데 정말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아크스는 아직 한국어판이 없는 상태라 구구절절 말하기가 좀 면구스럽다. 더군다나 아크스 캠페인 버전은 20만원쯤에 구매해서 2~3일을 들여야 한 판이 끝난다.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지만 많이들 ‘그렇게까지?’라고 되물을 것 같다. 그렇게 할 만큼 보드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아크스만큼 평가가 좋았던 게임은 자발적으로 바로바로 플레이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여기서는 접근성을 고려해 내 주변에서 가장 스테디하게 인기 있었던 게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올해 내내 누구와 플레이하든 챙겨들 만했던, 언제나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던 믿음직한 게임이다. 이름은 코드네임이다.
코드네임은 이미 몹시 유명하고, 처음 발매된 지 10년쯤 지났다. 테마가 독특하거나 구성품이 화려한 것도 아니라서 그리 대단찮아 보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심드렁했다. 그래도 평이 좋으니 한 번 해보자 하고 시작했다가 약간 충격받았다. 이거, 재미있네? 주변에도 두루 추천했다. 이건 너의 어휘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게임이다. 규칙은 아주 간단하고, 준비물은 한국어 실력뿐이다. 잘하긴 쉽지 않은데 시작하면 진짜 열심히 하게 된다.
게임의 구성품은 낱말 카드가 거의 전부다. 우선 참가자는 두 팀으로 나뉜다. 각 팀의 1명은 팀장이 되어 자기 팀원에게 힌트를 주는 역할을 맡는다. 팀원은 바닥에 깔아둔 25장의 낱말 카드 중에서 팀장이 암시하는 낱말이 무엇일지 고심한다. 정답을 맞추면 연속해서 도전할 수 있다. 틀리면 상대팀에게 차례가 넘어간다. 그렇게 목표를 먼저 다 찾은 팀이 승리한다. 각 팀의 인원을 동일하게 맞추려면 참가자가 짝수여야겠지만, 경험해 보니 홀수여도 큰 차이는 없다. IQ 100인 사람이 셋 모인다고 해서 둘일 때보다 지능지수가 상승하진 않는 원리다. 인원이 늘면 말이 많아질 뿐 게임에서 더 유리하지는 않았다.
이 게임의 요건은 힌트를 주는 방법이다. 팀장은 오로지 단어 하나와 숫자 하나만 말할 수 있다. 힌트로 쓰는 단어는 목표와 의미상 관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숫자는 힌트와 관련 있는 낱말 카드의 숫자여야 한다. 만약 비행기라는 낱말 카드를 가리키고 싶다면 힌트로 하늘, 공항, 날개 등의 단어를 떠올릴 법하다(‘비행’은 카드에 나와 있으므로 힌트로 사용할 수 없다). “공항, 1”은 무난한 힌트다. 문제는 힌트 하나로 목표를 여럿 가리켜야 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팀원이 오답을 지목하지 않도록 잘 피해야 한다. 오답을 고르면 차례가 넘어갈 뿐만 아니라 게임에서 즉시 패배하는 경우가 있다.
만약 팀장이 비행기, 여름, 화성이라는 낱말 중에서 둘 이상을 가리켜야겠는데, 오답인 일요일이라는 낱말은 제외하려 한다면 대체 무슨 힌트를 말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우주‘비행’, ‘여름’휴가 등은 카드에 있으므로 쓸 수 없다. 휴가철이라고 말하면 여름과 비행기를 가리킬 순 있겠지만 일요일을 배제하기가 어렵다. 스페이스X나 NASA는 어떨까. 아니면 지난여름 화성에서 발견된 체야바 폭포라는 암석을 말할 수도 있다. “체야바 폭포, 3”이라고 뱉은 다음 팀원이 어떻게든 화성, 여름, 비행기를 지목하길 기다리는 것이다. 보통은 “그게 뭐야”라는 원성을 살 테지만, 우연히도 팀원이 그게 뭔지 알 법한 사람이라면…… 지음을 만난 듯한 기쁨을 누릴지도 모른다.
코드네임을 잘하려면 팀장과 팀원이 서로 상대의 관점을 헤아려야 한다. 팀장은 목표를 가리키되 그 낱말 자체는 사용하지 않는다. 팀장의 일은 글쓰기 과정과 닮았다. 작가는 창작물로 말하고, 팀장은 오로지 힌트만 말할 수 있다. 해석은 독자 혹은 팀원의 몫이다. 창작 의도가 잘 통할지는 시도해 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힌트가 시원찮거나, 해석이 엉뚱하게 흐르면 답답함이 솟는다. 반대로 서로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마음이 흡족해진다. 절묘한 힌트가 등장하면 팀에 상관없이 감탄이 나오기도 한다. 내가 코드네임을 재미있게 플레이했던 이유는 어쩌면, 주변에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가에게든 독자에게든 단어는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엔 참으로 불완전한 매개다. 그래서 어떻게든 잘 전달하고 전달받으려고 노력하게 되고, 또 기대를 품게 된다. 코드네임은 그런 창작과 해석을 작은 규모로 반복하는 게임이다. 더욱이 아주 즐겁게도, 실패해봤자 탄식 한 번이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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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완선 (SF평론가)
책과 글쓰기와 장르문학에 관한 글을 쓴다. SF의 재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 및 사회적 평등과 문학의 연결 고리에 관심이 있다. 단행본으로 『아무튼, 보드게임』, 『SF와 함께라면 어디든』, 『우리는 SF를 좋아해』, 『SF는 정말 끝내주는데』를 썼고, 『취미가』,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를 함께 썼다. 이외에 《어션 테일즈》, 《기획회의》, 《한국일보》,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채널예스》, 《아르떼》 등에 글을 연재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하는 《SF 보다》 시리즈의 기획위원이며, 《문학웹진 림》에 SF 비평 대담 ‘이인삼각 SF’를 연재했다. 칼럼, 리뷰, 비평, 해설, 대담, 인터뷰, 강의 등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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