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혜진 문학평론가
#텍스트읽기 #한국문학 #김수영 #모험과방황 #좌절과의지 #자기만의방식으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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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곧 소설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소설의 일부가 맞지만, 이야기가 곧 소설은 아닙니다. 이야기만으로 소설이 성립되지 않듯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소설이 아닐 수도 없죠.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재밌기만 한 일도 아닙니다. 훈련이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당신이 느끼는 게 맞다’는 식의 ‘자기 만족적 읽기’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매우 우려합니다. 문학작품을 읽는다는 건 한 길 사람 속을 탐험하는 것처럼 지난하고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문학작품을 잘 읽는 사람은 한 길 사람 속도 잘 꿰뚫어 볼 것입니다.
저는 민음사 한국문학팀에서 일하는 편집자이자 문학평론가입니다. 지난 15년 동안 많은 책을 만들었지만 그중에서도 김수영 시인의 책을 가장 많이 만들었습니다. 김수영은 ‘시인들의 시인’ 또는 ‘한국 현대시의 뿌리’라고 불립니다. 과장된 표현만은 아닌 게, 김수영은 드물게 독자가 있는 한국 고전 작가입니다. 기형도 전집과 더불어 스스로 호흡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상 거의 유일한 전집이 『김수영 전집』일 것입니다. 그의 책을 만들며 많은 사람들이 김수영을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막상 독자들을 만나 보면 김수영만큼 ‘이해’받지 못하는 시인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제가 봐도 무슨 말인지 아리송한 시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김수영을 읽는다고 할 때 실제로 그들이 읽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는 김수영을 부정하기 위한 노력도 해봤습니다. 김수영이란 존재가 좀 과대 평가된 건 아닌가 하고요. 그러나 「반시론」이나 「시여, 침을 뱉어라」,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 「현대성에의 도피」 같은 산문을 읽으며 그를 부정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그의 시는 난해했지만 그 난해함을 저의 방식으로 ‘읽어 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그가 쓴 산문에 있었습니다.
김수영은 자신이 쓰는 산문에서 통념상 드러내지 않을 법한 이야기들을 서슴없이 드러냈습니다.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자기 폭로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발가벗었습니다. 누군가의 발가벗음을, 여러분은 보고 싶지 않을 거예요. 드러낸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를 담보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바닥 모르고 내려가는 그 깊은 고백에는 비할 데 없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근대의 정신이었습니다. 개인을 드러내는 방법이자 개인을 주제화하는 데 필요한 형식이 바로 고백입니다. 요컨대 김수영의 산문은 개인이 주체화되는 근대문학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가 드러나는 근대적인 산문을 쓴 김수영은 그 시대의 모더니즘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문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정신은 어떻게 형성된 걸까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성취는 그의 좌절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EBS 다큐 드라마 「명동백작」을 보다 의외로 깜짝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명동에 있는 바에서 동료 작가들과 시와 철학을 논하다가도 그 문을 열고 나오면 바깥은 한국 전쟁 이후 폐허의 촌바닥인 상황. 그것이 바로 김수영의 현실이고 괴로움이었으되, 그러한 부조화는 그의 문학의 추진체였을 것입니다. 김수영은 부조화에서 비롯된 신경증과 멜랑콜리가 겹쳐진 산문을 썼습니다. 그의 시가 갖는 난해함이란, 그가 가진 괴로움의 본질이었던 부조화가 시적으로 형상화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문학적 권위에 압도되어 정직한 읽기 자체를 포기합니다. 남들이 해석한 대로 읽고 남들이 해석한 만큼만 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읽기가 아닙니다. 남의 읽기를 읽는 것에 지나지 않죠. 하나의 작품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기 위해서는 모험과 방황, 좌절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책 한 권이 우리 인생을 바꾸는 이유는, 읽는 행위가 바로 모험과 방황, 좌절과 의지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지도를 만들어가며 읽자, 그의 산문은 그의 시에 전복의 에너지와 전위의 깊이를 부여했습니다. 막막하기만 하던 시가 한 번에 다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김수영의 막막함을 이해할 것만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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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문학평론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출판사 민음사에서 일해온 문학 편집자이자, 201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이다. 비평집 『언더스토리』와 서평집 『이제 그것을 보았어』, 소설 해설집 『퍼니 사이코 픽션』을 출간했다. 2018년 젊은평론가상, 2022년 현대문학상(평론), 2023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 2024년 김종철시학상(평론)상 및 한국출판편집자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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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평론가와 함께하는 <아트 클래스 – 토크>
읽기 – 비평 사는 재미와 문학비평
12.12(금) 오후 7시 30분-9시 두산아트센터 Studio DAC 무료(1인 1장)
❋ 11.21(금) 오후 4시 예약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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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io DAC]Studio DAC: 아트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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